난뤄구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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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 [[자오다오커우]](交道口) 지역, 도시 중심축의 동쪽에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구러우 동대가]](鼓楼东大街)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핑안대가]](平安大街)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787미터, 폭은 8미터이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 [[자오다오커우]](交道口) 지역, 도시 중심축의 동쪽에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구러우 동대가]](鼓楼东大街)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핑안대가]](平安大街)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787미터, 폭은 8미터이다.


이 거리의 역사는 원나라 시대 [[대도]](大都)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명나라 때는 [[소회정공방]](昭回靖恭坊)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뤄궈샹]](锣锅巷)'이라 불렸다. 청나라 건륭 15년(1750년)에는 [[만주 정황기|鑲黃旗]](镶黄旗) 관할 구역에 편입되면서 '[[난뤄구샹]](南锣鼓巷)'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과거 이곳에 징이나 북(鑼鼓)을 만드는 상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단순히 '뤄궈샹'의 발음이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중화민국 시기에도 이 이름이 유지되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잠시 '[[후이황제]](辉煌街, 휘황 거리)'로 불리기도 했다가 다시 원래 이름을 회복했다.
이 거리의 역사는 원나라 시대 [[대도]](大都)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명나라 때는 [[소회정공방]](昭回靖恭坊)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뤄궈샹]](锣锅巷)'이라 불렸다. 청나라 건륭 15년(1750년)에는 [[양황기]](镶黄旗, 청나라의 군사편제) 관할 구역에 편입되면서 '[[난뤄구샹]](南锣鼓巷)'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과거 이곳에 징이나 북(鑼鼓)을 만드는 상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단순히 '뤄궈샹'의 발음이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중화민국 시기에도 이 이름이 유지되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잠시 '[[후이황제]](辉煌街, 휘황 거리)'로 불리기도 했다가 다시 원래 이름을 회복했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주 거리(남북 방향)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각각 8개씩, 총 16개의 후퉁이 규칙적으로 뻗어 나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나라 시대의 도시 계획 특징을 잘 보여주며,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궁제]](蜈蚣街, 지네 거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중국에서 원나라 시대 후퉁 구조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이자, 규모가 크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전통적인 기판식(棋盘式, 바둑판식) 민가 구역으로 평가받는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주 거리(남북 방향)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각각 8개씩, 총 16개의 후퉁이 규칙적으로 뻗어 나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나라 시대의 도시 계획 특징을 잘 보여주며,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궁제]](蜈蚣街, 지네 거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중국에서 원나라 시대 후퉁 구조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이자, 규모가 크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전통적인 기판식(棋盘式, 바둑판식) 민가 구역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