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뤄구샹: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에 위치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후퉁(골목)이다. 원나라 대도(大都) 건설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나라 시대의 후퉁 구조가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남북으로 뻗은 주 거리 양옆으로 각각 8개의 후퉁이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처럼 규칙적으로 배열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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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에 위치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후퉁(골목)이다. 원나라 [[대도]](大都) 건설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나라 시대의 후퉁 구조가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남북으로 뻗은 주 거리 양옆으로 각각 8개의 후퉁이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처럼 규칙적으로 배열된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 과거 많은 고관대작과 문화 명사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마오둔]](茅盾), [[치바이스]](齐白石) 등의 옛집을 비롯한 역사적 건축물이 남아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점차 상업화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다양한 상점, 식당, 카페, 바 등이 밀집한 베이징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상업 거리로 변모했다. 그러나 급격한 상업화와 과도한 방문객 집중으로 인해 본래의 특색이 희미해진다는 비판도 받아왔으며, 이에 2016년에는 3A급 관광지구 자격을 자진 취소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환경 정비 및 업태 개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러우]](鼓楼), [[후하이]](后海) 등 주변 명소와 함께 둘러보기 좋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에 위치한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후퉁(골목)이다. 원나라 [[대도]](大都) 건설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나라 시대의 후퉁 구조가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남북으로 뻗은 주 거리 양옆으로 각각 8개의 후퉁이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처럼 규칙적으로 배열된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 과거 많은 고관대작과 문화 명사들이 거주했던 곳으로, [[마오둔]](茅盾), [[치바이스]](齐白石) 등의 옛집을 비롯한 역사적 건축물이 남아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점차 상업화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다양한 상점, 식당, 카페, 바 등이 밀집한 베이징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상업 거리로 변모했다. 그러나 급격한 상업화와 과도한 방문객 집중으로 인해 본래의 특색이 희미해진다는 비판도 받아왔으며, 이에 2016년에는 3A급 관광지구 자격을 자진 취소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환경 정비 및 업태 개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러우]](鼓楼), [[호우하이]](后海) 등 주변 명소와 함께 둘러보기 좋다.


== 개요 ==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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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 [[자오다오커우]](交道口) 지역, 도시 중심축의 동쪽에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구러우 동대가]](鼓楼东大街)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핑안대가]](平安大街)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787미터, 폭은 8미터이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베이징]](北京)시 [[둥청구]](东城区) [[자오다오커우]](交道口) 지역, 도시 중심축의 동쪽에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구러우 동대가]](鼓楼东大街)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핑안대가]](平安大街)까지 이어지며, 총 길이는 787미터, 폭은 8미터이다.


이 거리의 역사는 원나라 시대 [[대도]](大都)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명나라 때는 [[소회정공방]](昭回靖恭坊)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뤄궈샹]](锣锅巷)'이라 불렸다. 청나라 건륭 15년(1750년)에는 [[만주 정황기|鑲黃旗]](镶黄旗) 관할 구역에 편입되면서 '[[난뤄구샹]](南锣鼓巷)'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과거 이곳에 징이나 북(鑼鼓)을 만드는 상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단순히 '뤄궈샹'의 발음이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중화민국 시기에도 이 이름이 유지되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잠시 '[[후이황제]](辉煌街, 휘황 거리)'로 불리기도 했다가 다시 원래 이름을 회복했다.
이 거리의 역사는 원나라 시대 [[대도]](大都)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명나라 때는 [[소회정공방]](昭回靖恭坊)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뤄궈샹]](锣锅巷)'이라 불렸다. 청나라 건륭 15년(1750년)에는 [[양황기]](镶黄旗, 청나라의 군사편제) 관할 구역에 편입되면서 '[[난뤄구샹]](南锣鼓巷)'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과거 이곳에 징이나 북(鑼鼓)을 만드는 상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단순히 '뤄궈샹'의 발음이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중화민국 시기에도 이 이름이 유지되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잠시 '[[후이황제]](辉煌街, 휘황 거리)'로 불리기도 했다가 다시 원래 이름을 회복했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주 거리(남북 방향)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각각 8개씩, 총 16개의 후퉁이 규칙적으로 뻗어 나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나라 시대의 도시 계획 특징을 잘 보여주며,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궁제]](蜈蚣街, 지네 거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중국에서 원나라 시대 후퉁 구조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이자, 규모가 크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전통적인 기판식(棋盘式, 바둑판식) 민가 구역으로 평가받는다.
[[난뤄구샹]](南锣鼓巷)은 주 거리(남북 방향)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각각 8개씩, 총 16개의 후퉁이 규칙적으로 뻗어 나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원나라 시대의 도시 계획 특징을 잘 보여주며, 마치 물고기 뼈나 지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우궁제]](蜈蚣街, 지네 거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중국에서 원나라 시대 후퉁 구조가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이자, 규모가 크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전통적인 기판식(棋盘式, 바둑판식) 민가 구역으로 평가받는다.